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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의 시대 - 제러미 리프킨 / 이경남 옮김 / 민음사

공감의 시대 - 제러미 리프킨 / 이경남 옮김 / 민음사

 

 


1부 - 호모 엠파티쿠스

2.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

p 54.
 사회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역할은 더욱 차별화 되고 자아의식은 더욱 뚜렷해진다. 동시에 다른 고유한 자아와 접촉하고 대면할 기회도 많아진다. 다양한 사람들이 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하게 될 가능성도 커진다.
 공감이 확대되면 다른 사람의 곤경이나 형편을 마치 자기자신의 것인양 느끼게 되고, 동시에 거기 그자리에 있었따는 이유로 자신의 자아의식이 강화되고 심화되는 역현상이 나타난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알아낸 것이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너에게서 나의 일부를 확인하고 너는 내 안에서 너의 일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p 76.
 아이의 발달에 정말 중요한 것은 충동 그 자체가 아니라 “자아를 구성하는데 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부모의 공감적 반응이 미약하거나 아예 없으면 아이의 발달은 억제된다. 이런 상태에서 충동은 “당연히 강한 유형이 되고” 파괴적 분노가 아이의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p 77.
 능숙하게 젖을 물렸을 때 아이가 보이는 반응에 엄마는 속기 쉽다.ㅏ 엄마는 수동적으로 젖을 무는 아기가 결코 세상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외적인 관계를 가지기 힘들며, 장차 하나의 개인으로서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못본다.
 프로이트가 인정만 하면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사회에서 개인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아기가 엄마가슴에서 젖꼭지를 만들어 내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 위니콧

p 85.
 엄마와의 유대감이나 애정을 맛보지 못한 아기들에게 살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서적 결합이 인간지능의 발달에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입증된 셈이다.

p 90.
 아주 좋은 부모는 아이에게 “안정적인 기지”를 마련해주고 아이가 그 기지를 기저삼아 마음껏 세상을 탐구할 수 있게 격려한다. - 보울비

p 91.
 좋은 부모는 첫째로 아이의 애착행동을 직관적이고 공감적으로 이해하여 애착욕구를 채워주고, 그렇게해서 그 욕구를 해소시켜주어야 한다. 둘째로 부모는 아이가 불안해하는 가장 흔한 원인이 사랑이나 보호를 받고 싶을 때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며, 부모가 계속 곁에 있어줄지 확신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이의 애착욕구를 부모가 존중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아울러 아이의 탐구욕구와 친구들이나 다른 어른들과의 관계를 점차 넓혀가려는 욕구도 존중해 줄 때 그런 애착욕구가 충족된다.

3. 생물학전 진화에 관한 감성적 해석

p 119.
 놀이의 상상을 통해 우리는 실체적인 경험과 추상적 사고를 하나의 종합적인 앙상블, 즉, 공감적 마음으로 모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정서적일 뿐 아니라 인지적이다. 우리는 정서를 표현하고, 동시에 추상적인 사고를 한다.
 우리는 인간적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 놀이를 한다. 놀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가장 심오한 행위이다. 놀이는 집단적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놀이하는 사람은 경계심을 풀고 잠깐이나마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함께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p 137.
 정신건강은 인간성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필요로 하며 인간성은 잘 발달된 공감인식을 필요로 한다고 그린스펀은 지적한다.

4.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

p 147.
 추리 훈련은 예측 가능한 줄거리에 따른 일종의 각본이라고 호프먼은 말한다. 첫째로 "아이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부모가 타이르고, 아이가 공감적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부모가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래서 해코지를 당한 아이에게 다가가 사과하고 안아 주고 키스해 주게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죄책감을 덜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각본은 기억에 저장되어 두뇌 회로의 한 부분으로 입력된다. 각본화된 모든 기억은 아이의 공감적 경험의 목록을 늘려 주어 장차 사회적 만남에서 꺼내 쓸 수 있는 경검의 도서관이 된다. (중략) 흥미롭게도 아기가 거울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그런 자각에 대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단계가 되어야 이런 공감 능력이 나타난다.

p 148.
 정상적인 부모라면 아이를 타이르는 순간만큼은 확실한 위엄을 갖추고 아이를 제압하여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주었던 고통에 대해 부모가 하는 말을 열린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게 해야된다. 아이의 행동을 비판하지 않고 배려와 관심으로 접근한다면, 공감적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죄책감과 아울러 자기가 괴롭힌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p 149.
 하지만 죄책감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추리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너무 자극하면, 아이는 자신이 입힌 상처를 회복할 엄두를 못내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반면에 부모가 아이에게 꼭 필요한 죄책감조차도 심어 주지 못한다면, 아이는 커서도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반성할 줄 모르고 유대감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공감적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제대로 된 부모라면 아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주면서도, 세심한 배려로 그가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설명해 주고 입장이 바뀌었을 때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게 함으로써, 부모는 아이가 갖고 있는 착한 마음과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사태를 만회하려는 욕구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아울러 아이가 잘못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아이를 향한 그들의 사랑이 식은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분명히 인식시켜주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서로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경솔함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다음에는 좀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전부이다.

 도의적 죄책감은 수치심에 비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도의적 죄책감은 보상이 가능하고 한 사람의 내면의 총체성을 더럽히지도 않는다. 도의적 죄책감은 자신을 낙꽌적으로 바라보는 고양된 정서이다. 도덕성은 금지시키고 숨 막히는 규율을 들이대며 완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해 주면서 그래도 세상에는 용서라는 자비심이 있다고 말해주어 아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치 있고 관심어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인간적 결함이 세상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결함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늘 착하게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부러움과 질투 같은 감정을 가질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 마사 누스바움

p 153 - 155
  프로이트는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은 자신이 괴롭힌 상대방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벌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이어서 끊임없이 부모와 기싸움을 벌이며 자신의 본능적 이기심을 충족시키려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와 통제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살아가기 위해 부모의 보호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죄책감이 들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나중에는 사회에 의해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트로터에 따르면 이타성은 인간이 무리 본능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생리적 구조의 핵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이다. 프로이트 시대의 통념과 어긋나는 자연도태에 대한 또 다른 견해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공감적 고통이 생물학적으로 본래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보고 공감적 고통을 느끼고, 특히 그의 고통에 자신의 책임이 일부나마 있다면 당연히 죄책감을 갖게 되고 뭔가 수습할 생각을 하게 된다.

5. 인류 여정의 의미를 재고하며

p 181.
 데카르트는 감정은 합리적인 측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두면, 감정은 궤도를 벗어나 합리적 정신을 더럽히고 멋대로 지배할 것이다. 감정을 인간이라는 '방정식'에서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느낌 없이 합리적으로 계측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감정은 없고 매우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을 예로 들겠다.)

p 184.
 인간은 다마지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앙상블'로 환경과 교류한다.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전체로 작동하는 생화학적 신경 규제 회로라는 복잡한 편성 체계이다. 결국 " 정신 현상은 일정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체의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봐야한다.

 p 185.
 신경학자들만 비실체적인 합리성(데카르트의 합리성)을 비판한 것은 아니다. 각 분야 학자들의 다양한 학설을 하나로 관통하는 생각은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20년 전에 이미 이를 그럴듯하게 표현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항상 주변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

 p 186.
 내가 알고, 네가 알고, 네가 안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정신 이론의 진정한 개념이며 정신생활은 바로 이런 개념을 기초로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 그 자체의 발달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다른 사람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경험한 부분에 속한 실체적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의 관계가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단순히 자율적인 나는 없다. 수많은 우리라는 독특한 군집이 있을 뿐이다.

 심리치료사인 존 로완과 믹 쿠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내면’의 삶의 내용은 개인으로서 우리의 ‘내부’에 철저히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은 우리의 삶을 사는 ‘가운데’있고,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른 것에 대해 그때 그 순간 대흥하는 방식 ‘속’에 있다.

p 188.
 작고한 신경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나는 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몸이 있다.’라고 말한다."

p 189.
 비실체적 견해(이성론, 아프리오)에서 몸은 정신의 내용, 즉 실질적 개념을 형성하지도 않고 그 개념에 의미 있는 추론적 내용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개념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인 것이며, 그런 개념은 심도 있고 추론적인 형식 구조를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형식 구조를 낳을 수 있는 정신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p 190.
 (반대의 입장) 개념의 진정한 속성은 두뇌와 몸을 조직하는 방식과 두뇌와 몸이 상호 관계와 물리적 세계에서 기능하는 방식의 결과로 얻어진다. 지금까지 흔히 생각해 온 것과는 달리 이성은 비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성은 우리의 뇌와 몸, 그리고 몸의 경험이라는 실체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느끼고 움직이게 해 주는 것과 같은 신경적, 인지적 메커니즘은 또한 우리의 개념적 체계와 이성의 양식을 창조한다. 어쨌든 이성은 우주나 비실체적 정신의 초월적 특징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은 우리 인간의 몸이 갖는 특권과 두뇌의 신경 구조의 뚜렷한 세부 사항과 세계 속에 있는 우리의 일상적 기능의 특징에 의해 형태가 갖추어진다.

p 196.
 존재는 관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존재의 진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적, 철학적 접근은 우리의 경험적 존재를 무시하는 싱앙과 이성과의 근본적인 결별이다.

p 197.
 자유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이들과는 상반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는 인생의 충만한 잠재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것이고, 충만한 삶이란 우정과 애정과 소속감의 삶이며, 보다 깊고 보다 의미 있는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성을 찾는 삶이다. 공감적 기회를 보장해 주고 격려하는 사회에서 양육되고 성장할 때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p 198.
 실체화 학파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진정한 자유는 불굴의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취약한 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가 자신이 갖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능력이고, 한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맺는 관계의 친밀함, 범위, 다양성이라면, 취약한 점이 많을수록 의미 있고 허물없는 관계를 맺는 데 더 개방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취약하다는 것은 나약하거나 남의 제물이 되기 쉽다는 뜻이 아니라 깊은 교제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기는 자신을 숨김없이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실체론 옹호자들은 말한다. 용기는 자신의 삶의 가자아 본질적인 세부 사항까지 상대방의 손에 맡길 의향이 있다는 말이다. 취약하다는 것은 같은 인간을 믿겠다는 것이다. 그 믿음은 다른 사람이 당신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할 것이라는 믿음이며, 당신이 상대방의 편리를 위한 목적에 이용되거나 함부로 취급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누구도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 자유는 당장 부정적인 것이 되고 상대방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스스로 고립되는 능력을 의미한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고 불신을 조장하고 싸움을 부추기는 권위적인 사회에서 자유 정신은 기를 펼 수 없다.

p 200.
 자신의 취약함과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취약함과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 모든 감정적 요소를 가두어 놓은 상태에선 실제로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 영혼을 가두고 본성을 묶어 놓은 상태에선 세상에 참여하여 의미 있는 표현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페르소나에 갇힌 수인이다. 그런 쇼ㅏㅇ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그의 모습을 알 수 없고 그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고립되고 추방당한 사람과 다름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p 201.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내 것'과 '네 것'이 없고 오직 '나'와 '너'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 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p 209.
 능률에 대한 근대의 병적인 집착은 대부분 밑바탕에 깔린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고, 시간을 아껴 현세에서의 수명을 꾸준히 미래로 확대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비롯되었다. 지나치게 능률적인 사람은 늘 두려움의 냄새를 맡는다. 그런 사람과 가까워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감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초월한다. 실체적 경험이 현세적 성격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허약함을 인정하고 삶을 최대한 누림으로써 초월한다.

p 216.
 중요한 것은 이성의 원천이다. 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성이 경험을 거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아프리오한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나 칸트식 관념은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추론하는 방법과 맞지 않는다. 이성은 경험을 짜 맞추는 방법이고 그래서 많은 정신적 도구에 의지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성이 경험과 떨어져 존재하는 비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을 이해하고 다루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p 217.
 공감의 순간은 거리낌 없는 참여도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감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느낌에 완전히 빠져 그 느낌에 압도된다면 자아의식을 잃기 때문에 그들의 느낌을 우리의 느낌으로 상상할 수 없다. 공감은 미묘한 균형감각을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의 곤경을 자신의 일처럼 체험해야 하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독립적 존재를 만들어 주는 자아의 능력까지 버려서는 안된다.

p 219.
 칸트는 감각을 가리켜 도덕적 행동으로 이끌어 주는 안내자로 삼기에 믿을 수 없는 대상이라고 못 박았다. 느낌, 감정, 열정은 너무 주관적이고 자의적이어서 보편적 도덕 기준을 수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대신 그는 정언명령이 시대나 상황에 구애받지않고 경험적 상황에서 독립하여 보편적인 도덕률을 분명히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은 감정적인 주관과 별도로 도덕적 당위를 명령한다. 도덕적인 사람은 냉정하고 공평하고 사심이 없으며, 감정이나 열정보다는 이성과 도덕적 책임에 의해 움직인다.

p 222.
 인간이 선한 것은 처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명령이나 약속에 의해 도덕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곤경을 나의 곤경으로 느낌으로써 도덕적 행동을 실체화한다.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고, 따라서 실체적 경험 속에서 도덕적으로 적절하게 되는 것이다.

2부 - 공감과 문명

6. 고대 신학적 사고와 가부장적 경제

p  231.
 대화를 하려면 어떤 식이로든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몰두할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나의 정체성도 더욱 확실해진다. - 루이스 뒤프레

p 233.
 흔히 늘 하는 대화에도 어떤 사건을 놓고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마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서로 다른 설명을 들으면서 사람마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약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느낌이 자신의 느낌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같은 사건을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관점의 차이를 이해할 뿐 아니라 공통의 느낌을 찾는다. 이것은 자의식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겪는 중요한 학습경험이다. 자의식은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관점과 자신이 스토리로 다른 사람을 고유한 개인으로 경험하고 공통의 정서적 기반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때 이야기는 공감적 고통을 공감적 참여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p 256.
 그러나 시각은 늘 개인화된 경험이다. 한쪽은 다른 쪽에 집중한다. 시각에서는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의 경계가 분명해진다. 시각은 주제와 객체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소리는 둘러싸지만 시야는 펼쳐진다. 소리는 감싸는 인식감각으로 이끌지만 시야는 탐구적 인식으로 통한다. (중략)
 하지만 쓰는 행위는 사적인 개념이다. 문장 하나를 만들려 해도 혼자 있는 자리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붙들어야 한다. 기록 문화도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글을 읽어도 큰소리로 함께 읽곤 했다. 그러다가 점차 혼자 하는 행위로 변했다. 하지만 혼자 읽을 때에도 늘 큰 소리로 읽었다. 시각보다 청각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p 257.
 ‘회계’(audit에서 ‘aud-‘는 ‘정각’, ‘귀’를 뜻하는 접두어)라는 단어는 문자 문화로 바뀌는 과정에서 살아남아, 구두 문화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역사적 상기물이다.

p 288.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글로 나타낼 때 뉘앙스가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여 감탄할 만한 문체로 풀어 낸다면 한층 더 강렬한 공감적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잘된 글을 대하면 가공의 인물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 것보다 더 실감이 나는 경우가 많다.
 상투적인 말은 그래서 고유한 상황의 핵심을 뚫지 못하고 따라서 진행되는 상황을 적절히 묘사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문자언어는 상투적 상호 작용리나는 굴레를 벗겨 준다. 모든 문장은 상호아의 특수성을 전달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조합된다. 커뮤니케이션은 개성적이 된다.

p 260.
 글을 읽을 때는 구두 문화 같은 친밀한 참여적 특징을 사릴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혼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글을 읽을 때는 성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다는 것은 혼자서 대화의 의미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p 261.
 쓴다는 것은 아는 쪽과 알려지는 쪽을 분리하여 더욱더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과 완전히 구별되는 외부의 객관적 세계뿐 아닐 객관적 세계와 대립되는 내면의 자아에 대해서도 영혼을 개방하는 행위이다.

7. 국제 도시 로마와 기독교의 발흥

p 300.
 깨달음이 과연 인간의 나약함이나 육체성을 지닌 채 세상에 적극 참여해서 얻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나약함과 육체적 존재를 제거한 다음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야 얻어지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적 예수는 철저히 세상에 몰두했다.
 예수가 나약하고 공감적인 존재인 데다 모든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렸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깊고 개인적인 정서적 공명을 일으켰다. 예수의 삶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동정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영감을 주었다.

p 306.
 신약에서는 예수의 어떤 가르침 속에도 아이를 훈련시키는 수단으로 체벌을 옹호하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바울은 “자녀가 되신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도, “아버지가 되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시키지 마십시오. 그들의 기를 꺾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토를 달았다. 아이 학대가 아이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현대의 정신분석 못지않게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8. 중세 말의 연軟 산업혁명과 휴머니즘의 탄생

p 342.
 몽테뉴는 인간의 정신을 육체와 따로 놓고 생각하려는 정통 기독교를 이렇게 빈정댄다.
 인간의 정신은 몸과 너무 친해서 필요할 땐 언제든지 나를 버리고 몸을 따라간다. 한쪽으로 데려가서 비위도 맞춰 주고 설득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둘 사이를 떼어 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세네카와 카툴루스(사랑과 실연을 노래한 로마의 서정시인)도 들먹이고 숙녀들이나 발레도 권해 본다. 친구가 배앓이를 하면 저도 같이 앓는 것 같다. 그럴 땐 특히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 코감기에도 꼼짝 못한다. 몸이 맥을 못 추면 마찬가지로 (정신도) 활기를 잃는다.
 몽테뉴는 특히 몸을 혐오하는 철학자들에게 가혹하다.
 철학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학문이다. 철학은 핏대를 올려 가며 사람을 가르치려 든다. 성과 속, 합리와 비합리, 엄격함과 방종, 명예와 치욕의 결합은 상스러운 관계라는 것이다. 육체의 쾌락은 현자가 즐길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몽테뉴는 금욕적 삶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육체를 혐오하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을 사랑하기가 힘들다. 몸으로 겪는 실체적 경험은 공감의 표현을 향해 열린 창이다. 다른 사람의 곤경과 고투를 경험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어려움인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 그들이 보다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다가가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보다 더 충만해지고 보다 더 인간적이 되고 더 깊은 존재의 실재와 연관을 갖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만물의 원대한 설계 속에서 우리가 처한 곳을 알게 된다. 공감은 전적으로 육체성을 입은 채 노래하는 삶의 예찬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감은 또한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수단이다.

p 344.
 대게의 경우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이미지와 공적인 이미지를 따로 마련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p 345.
 진실성은 중요한 것이지만 상황이나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페르소나를 바꾸게 되면 생각이 수월해지고 공감의 폭도 넓어지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외적인 가면은 진정한 자아를 속이거나 숨기는 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덕분에 다른 페르소나를 써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고 평상시 만나기 힘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 사람이 될 자유가 생기면 다른 사람의 곤경을 자신의 것처럼 경험하고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주의적 행동의 의미이며, 그런 개방적 태도를 통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환경과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역할에 편하게 적응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하고 더 많은 경험을 통해 폭넓은 생각을 갖고 새롭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정체성도 풍부해진다. 그때는 속이는 것이 아니라 초연해 진다.

p 354.
 1705년에 플리트우드의 주교는 가족 관계의 기반이 되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새로운 '이해'의 전제를 내놓았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가족이든 시민이든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어디에고 없다. 오직 각 당사자에게 지워진 상호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고 섬기고 존경하고 복종해야 할 의무는 원래 부모의 사랑과 배려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p 355.
 (이상적인 결혼에 대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줄 목적으로 상대를 선택했을 때, 한쪽의 만족은 다른한쪽이 그만족을 함께 누리기 때문에 더욱 배가됩니다.

p 374.
 1789년 6월 17일, 제 3신분 의원들은 국왕 루이 16세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들은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몇 달 뒤 급진파들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선포했다. 이 인권 선언은 무엇보다도 "모든 주권의 근본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라고 못 박았다.
 이 한문장으로 신성한 권위를 휘두르며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왕위를 세습했던 정부는 무너졌다. 이후로 주권은 '국민'에게 놓이게 되었다. 국민은 누구인가? 시민이다. 시민은 누구인가? 공동의 생활경험을 갖고 집단적 과거와 미래의 운명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프랑스에서 시민, 국민, 국가는 하나의 단일 통치 실체로 결합되었다. 이후로 정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었다.

p 380.
 루소는 [고백록]을 쓴 동기를 애써 강조했다.  "나는 이 책이 비할 데 없는 진실성 하나로만 두드러지는 작품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적어도 어떤 한 가지 사례엥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그의 내면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 심지어 그는 그 이전에 누가 했던 것보다 자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루소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참모습을 안다면, 즉 그가 원래 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여전히 확신했다.

p 386.
 괴테는 모든 피조물이 고유하면서도 하나의 통일체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에 전율했다. "자연이 창조한 모든 것 하나하나가 자신의 개성을 갖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이다."

9. 근대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사고

p 397.
 토머스 홉스의 인간은 인간은 탐욕적이어서 사회계약으로 억제할 필요가 있다. 존 로크의 인간은 재물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예외가 있지만 원래 백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덕을 함양해야 한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은 자연의 상태에선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에 의해 타락할 위험이 있다. 제러미 벤덤의 인간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은 최소화하려는 공리적 존재여서, 그들의 욕망을 증진시키고 미련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토머스 제퍼슨은 인간은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존재이다.

p 398.
 따라서 근대의 중요한 의문은 느낌과 생각,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적절한가 하는 문제였다. 이 두 가지 양식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가?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좋은 의식 수단인가?

p 427.
 프로테스탄트 개혁가와 계몽철학자들처럼 낭만주의자들도 개인주의를 강조했지만, 낭만주의의 개인은 그들처럼 구원을 찾아 신과 단독으로 대면하지도 자신의 이익을  좇아 시장에서 홀로 서지도 않았다. 낭마주의자들의 개인주의는 종류가 달랐다. 그들에게 개인근 창조적 잠재력을 부여받은 고유한 존재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이었다.

p 429.
 다른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공감의 낭만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능력이 없다면 공감도 있을 수 없고 지상의 초월을 위한 낭만적 탐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p 434.
 휘트먼은 욕망과 동경을 철저한 나약함의 표현으로 보고, 따라서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인생의 짦음을 절감한다는 것이다. 성 경험은 무엇보다 굴복하는 것이고, 풀어 주는 것이고, 통제력을 잃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섹스보다 더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없다. 섹스는 벌거벗은 모든 나약함 속에서 두 사람이 드러내는 생에 대한 덧없는 찬미이다.

p 441.
 쇼펜하우어에게 공감에 대한 인간 능력의 기원은 불가사의였지만, 그 목적론은 분명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인 것처럼 느끼고, 위로의 손길을 뻗치고,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그들에게 힘을 줌으로써, 우리는 우리 모두와 다른 사람, 그리고 모든 지구 위의 생명을 이어 주는 통합의 실타래를 인식한다.

p 443.
 낭만적 사랑은 공감 의식의 거대한 실습장이 되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상대방의 내면의 존재, 본성, 영혼을 살피고 그에 맞춰 행동하려 애를 썼다. 그들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기분이 어떻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동시에 그들은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에 대한 느낌이 어떤지,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스스로 자문했다. 이런 반복된 질문을 통해, 그들은 감정적으로 서로의 느낌에 동조하고 서로의 곤경을 자신의 곤경인 것처럼 공감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울메이트soulmate'였다. 상대방과 함께 울어 주고 달려가 그들을 돕고 그들의 승리에 기뻐하고 그들의 성공을 상대방과 함께 축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낭만적 사랑의 본질이었다.

p 455.
 루소와 낭만주의자들에게 진정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고통스러운 삶을 겪어보고 아울러 다른 사람의 곤경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관심과 동정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소외된 사람들만이 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존재의 감정을 이렇게 정의했다.
 존재의 감정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다. 그 공동의 장소는 모두의 것이자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그곳은 모두의 것이다. 그곳은 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존재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보편성이다. 그것의 진가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다. 행동을 통해 나는 일반적인 것을 고수하기 위해, 일반적이 되기 위해 나는 나의 독자성을 벗어 던진다. 누구와도 닮지 않았지만, 정확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람의 체현이다.

10. 포스트모던의 실존적 세계에 담긴 심리학적 의식

p 481.
 니체는 신학자와 합리주의자들의 뒷덜미를 잡고는 '절대 영혼'이나 '순수이성'이라는 환상을 버릴 때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원근법적 시각, 즉 하나의 원근법적 '인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사물에 관해 많은 감정을 말하도록 할수록, 한 가지 사물을 관찰하는 데 더 많은 눈, 다양한 눈을 사용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즉 우리의 '객관성'은 더욱 완벽해질 것이다.

p 482.
 아인슈타인은 절대 시간이란 개념을 거부하면서, 시간 그 자체는 관찰자와 관찰되는 대상 사이의 상대적 움직임에 의해 결정되는 관점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p 486.
 그러나 마사 누스바움이 지적하듯, 인생은 끝없는 장애물과 예기치 못한 우여곡절로 가득차있다. 삶은 번잡하고 혼란스럽고 지루하기 짝이 없으며, 우주적 초월보다는 우스꽝스러운데 히스테리를 드러낼 때가 많다. 그래도 모두들 참고 견딘다. 그러나 초월을 바라는 중에도 짬을 내어 화장실 변기에 앉거나 5분 정도의 수음으로 스트레스를 덜어 낼 필요는 있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요요 놀이 갔다. 올라가면 내려온다. 번쩍이는 통찰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땅을 치는 절망의 순간도 있다.

p 487.
 서로에게 공감할 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는 상대의 일상적 투쟁을 인정하고 좀 더 잘살아 보려 애를 쓰고 자신을 초월하려는 서로의 욕구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을 괴롭히는 악마와 결함과 불완전성과 씨름할 대도 우리는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고지를 향해 오르려 안간 힘을 쓰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약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관용으로 감싼다. 이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무수히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조이스의 등장인물들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밥 없는 현실 속의 사람들이고 모순으로 가득 찬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애틋한 감상 따위가 없어도 그들과 공감할 수 있다.

p 498.
 정체성에 대한 제임스의 견해는 복수 시점을 강조한 미술의 관념과 복수 역할을 선호한 개성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를 아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사회적 자아가 있다."라고 썼다.

p 504.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관계는 우리 생존의 핵심이다. 우리는 관계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면서 관계를 시작하고,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p 505.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회복중인 알코올 중독자와 증세가 심한 알코올 중독자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재활 과정은 12단계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지만, 결국 재활을 추진하는 핵심적 힘은 회복 중인 사람과 중독자가 함께 참여하여 공감을 나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아무에게나 말하기 힘든 고충을 여러 사람앞에서 털어놓고 나눔으로써, 그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충고하고 회복을 도와주면서 공동의 신뢰를 쌓아갔다. (베치마킹을 생각하면서....)

p 520.
 자조 모임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 대면 집단처럼 그들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눈어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거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슷한 곤경이나 처지를 가진 사람끼리 조직되기 때문에, 마음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공감으로 서로 감싸 주도록 격려하게 되면 동정적인 소속감이 생긴다. 다른 사람의 처지와 정서적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친밀감을 느끼고 돌봐주고 인정해 줄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수단이다. 함께 있따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큰 힘을 얻는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판단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런 자조 모임의 핵심에는 공감의 확대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자조 모임은 이름이 암시하듯 공감 의식을 통해 회원 각자가 자존감과 가치를 되찾고, 그리하여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며,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사회적 낙오자나 문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서로 조금만 도와주면 각자가 스스로 희생자의 이미지를 벗고 능동적 주체가 되려고 애를 쓴다.

3부 - 공감의 시대

11. 세계적 공감의 정상을 향한 등정

p 531.
 매일 3조 2000억 달러가 광속으로 자본 시장에서 교환되고 있다. 하루에 4만 9000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가르며 사람과 화물을 몇 시간내에 지구 곳곳에 내려놓는다. 2,500대가 넘는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며 40억 이상의 인구에게 정보를 보내 준다. 위성항법장치(GPS)는 대륙 구석구석을 추적하며 기상 상황을 탐지하고, 서십억의 사람들에게 화면과 소리와 문자를 보내고, 테러리스트의 활동을 정탐하고, 수많은 운전자에게 목적지를 알려준다.

p 540.
 상업적 유대와 공감적 유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얼핏 역설로 들리겠지만,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분명 공생적이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은 그의 기념비적인 역작 [돈의 철학]에서, 주화는 익명의 당사자 사이에 확립된 집단적 신용의 전제를 바탕으로 한 약속어음이며,  두 당사자 간의 신용은 지금까지의 거래에서 통용된 이 징표가 앞으로 이어질 거래에서 제3자에 의해 존중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해 준다고 지적했다.
 거래의 역사에서 사실상 사회적 거래가 상업적 거래에 앞선다는 사실을 간파한 인류학자들의 발견은 주목할 만하다. 뉴기니 섬 동쪽에 있는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주민들은 조개껍데기를 정교한 사회적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했고, 종종 카누를 타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여행할 때 사회적 신용의 유대감을 다지는 수단으로 이 징표를 주고받았다.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 상업적 교환은 언제나 사회적 교환 다음이었다. 이것은 문화적 자본이 상업적 자본에 선행하며, 상업은 문화적 관계의 확장일 뿐, 인류의 일상사에 일차적 제도는 아니라는 오래된 지혜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사례이다.

p 553.
 관광객들과 깊이 사귀고 교류하다 보면 그들만의 문화적 방법을 이해하여 보다 개방적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도 더 분명히 알고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우정을 나누기 위해 양쪽은 공통의 기반을 찾으려 애쓰게 된다. 지역 주민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눈 대화와 짧지만 함께 지낸 시간을 통해 공감적 유대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그네가 해외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체험이다.

p 557.
 한 사람을 깊이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그 사람의 인생을 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안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만의 스토리를 안다는 것이다.

p 563.
 자의식이 분명하면 다른 사람에게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을 신뢰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훨씬 너그러워질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외부의 존재를 두렵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12. 지구촌 에트로피의 심연

p 618. ~620.
 가령 [버지니아 권리선언]은 이렇게 밝힌다.
 모든 사람은 본래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타고난 권리를 갖고있다. 그것은 곧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고, 행복과 안전을 추구하고 손에 넣는 수단과 함께 인생과 자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은 재산이 인격의 확장이라고 주장하면서 둘의 관계를 포착하려 했다. 그에게 재산은 개인의 의지를 ‘사물’ 속에 투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외부 세계의 일부를 빼앗아 그것을 자신의 팽창된 페르소나에 포함시킨다. 재산은 확장된 자아의 일부를 빼앗아 그것을 자신의 팽창된 페르소나에 포함시킨다. 재산은 확장된 자아의 일부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와 실체를 투사하는 방법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인격은 자신에게 현실성을 주기 위해 투쟁하는 것, 즉 다시말해 외부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를 자신의 인격으로 주장하려면 재산이란 제도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파악하고 인정하게 된다. 헤겔에 이르러 재산과 인격은 거의 같은 개념이 되었다. 한쪽은 다른 한쪽의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재산을 많이 모을수록, 인격이 더 계발된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그리고 인격이 계발될수록, 행복한 자아가 될 수 있다.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곧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자연법 이론의 깃발을 뽑아 들고 “가장 행복한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가능한 최대의 양을 그들에게 보장해 줌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복을 재산의 소유와 결부시키고 재산을 인간의 기본 본성의 원동력으로 삼아,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보다 많은 부를 얻으려 하는 취득 본능을 가진 동물이라는 사상의 기초를 닦았다.
 “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로 통하는 길과 행복으로 통하는 길은 하나뿐이고 같은 길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역사의 전횡에서 빠져나와 복잡한 사회적 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부보다 상위 자리에 인간 의식의 진보를 놓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거의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적 장치는 보다 집약적인 에너지 처리량을 필요로 하는,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 엔트로피의 환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새로운 사회학적, 심리학적, 인식적 연구 결과를 쏟아 내면서 부의 증가와 행복의 증가를 등식화하는 기본 명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찾아낸 것은 비교적 분명하지만 사람들의 대화에서 흔히 다루어지지 않았떤 것이다. 너무 가난하여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조차 구하기 힘들면 누구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모든 연구가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똑같은 연구를 통해 이들은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이 충족되었을 때 그 이상의 재산 축적은 도리어 행복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냈다. 필요 이상의 재산은 오히려 불행을 가져다주고 우울, 걱정, 그 밖의 정신적, 신체적 질병에 걸리기 쉽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을 못 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 교수 팀 케이서는 그런 사실을 증명해 주는 많은 연구를 이용하며 이렇게 결론 내린다.
 부와 소유의 추구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그런 쪽에 그만큼의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보다 심리적으로 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팀케이서는 조사를 통해 삶의 일차적 동기가 ‘돈, 이미지, 명성’인 학생이나 사회 초년생들은 그런 가치에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는 사람보다 우울증이 심하고 신체적 질병도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물질적 가치와 약물 중독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밝힌 연구 결과도 있다. 아울러 물질적 추구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은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덜한 젊은이들보다 더 부정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들은 또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보이고, 강박관념이 있으며,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소유욕이 강하며, 너그럽지 못하고, 샘이 많고,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며,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도피 성향이 있거나 지나치게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공격 성향을 띠는 것으로 드러났다.

p 621.
 그 밖에도 많은 연구에서 “물질적 가치가 생활의 중심이 될수록, 삶의 질은 낮아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이 모든 연구들이 시사하는 것은 경제적 안락을 느끼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에 도달한 이후의 평균 해복은 부의 축적이 증가할수록 오히려 내려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민이 그보다 못사는 나라의 국민보다 별다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부유해질수록 불행하다면, 공감적 유대감도 경제적 형편이 좋아진다고 따라서 좋아지는 것도 아닐 것이고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여 그 뒤에 따라오는 엔트로피 폐기물과 에너지 소비가 늘어난다고 공감적 유대가 확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들 연구는 또한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 이상으로 부의 추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부의 소유는 결국 사람의 마음까지 소유해 버려,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p 622.
 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귀가 닳도록 들어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돈을 벌려고 한다. 하지만 돈을 벌어도 돌아오는 것은 낙담뿐이다. 예전에 생각했던 행복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아직 원하는 만큼 부유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보다 더 힘겨운 목표를 향해 다시 도전한다. 그래도 역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쳇바퀴를 돌리게 하는 원동력은 광고, 마케팅, 이미지 창조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부어 가며 우리를 세뇌 시키고 이윤을 내는 상업시장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수익을 오릴 수 있는 행동만 하고, 모든 사람과 사물을 자신의 부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한다. 다른 사람은 더 이상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결국 나는 주변의 애정과 우정으로부터 고립된다. 남는 것은 소외감뿐이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다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진다. 물질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익빡에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할수록 사람을 못 믿게 된다.

p 623.
 행복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는 또한 행복감이 상대적 비교우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리처드 레이어드는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들을 상대로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시했다. 첫 번째는 내 연봉이 5만 달러이고, 다른 사람의 연봉은 2만 5000달러인 경우이고, 두 번째는 내 연봉이 10만 달러인데 다른 사람의 연봉은 25만 달러인 경우이다. 대다수의 학생은 첫 번째를 택했다. 다른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의 부의 창출을 행복과 동의어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재산의 추구 자체가 치열한 경쟁이다. 사람들은 절대적 조건으로 자신의 행복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측정한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 더 행복해지리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위를 보면 부러움뿐이고, 아래를 보면 뒤처진 사람들이 던지는 곱지 못한 시선이 전부이다. 사람들은 부를 비교해 가며 서로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공감의 느낌을 개발할 여지는 별로 없다.

p 624.
 리처드 레이어드는 행복 신드롬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래서 생활 수준은 알코올이나 마약과 비슷한 면이 있다. 새로운 행복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일종의 쳇바퀴를 타는 셈이다. ‘쾌락’이란 쳇바퀴를. 행복을 유지하려면 계속 쳇바퀴를 굴려야 한다.
 행복 신드롬은 사람들을 절망의 경주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 게임에서는 이길 수도,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다. 물론 해결책은 분명하다.
 언뜻 납득이 가지 않겠지만, 행복 신드롬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안락한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갖춘 상태라면 사람들의 재산과 수입의 격차가 비교적 크지 않은 사회가 더 행복한 사회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런 점에서 좋은 사례 연구감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조사 결과에 의하면, 유럽연합의 많은 나라 사람들은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며, 반면에 미국 사람들은 그 반대라고 답했다. 여기에는 철학적 인생관의 차이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변함없이 ‘개인적 성공의 기회’를 강조했고 그 성공은 대체로 재정적인 성공이었다. 그러나 유러피언 드림은 ‘삶의 질’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고 그 성공은 레저, 안전한 사회, 깨끗한 환경, 보편적인 의료 혜택, 수준 높은 교육 같은 사회적 기준에서 바라본 성공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공동체의 삶의 질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리처드 레이어드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찾아낸 결과와 일치한다. 레이어드는 이렇게 쓴다.
 이런 심리학적 현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도출된다. 돈이 부유한 사람에게서 가난한 사람으로 옮겨 가면,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 잃는 것 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평균 행복은 올라간다. 따라서 한나의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는 없겠지만 그 수입을 보다 균등하게 배분하면 평균 행복의 수준을 올릴 수 있다.
 유럽 사람들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미국 사람들보다 평균 29.3퍼센트 낮고, 집도 차도 미국 사람에 비해 작고, 옷도 많이 않으며 가전제품도 적다. 더구나 그들 수입의 상당 부분은 ‘공공’서비스를 위한 세금으로 나간다. 공공 서비스는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미국 사람들은 시장 모델을 강조하는 데 반해, 유럽 사람들은 사회적 모델을 강조하기 때문에 빈부 격차는 줄어든다. 결국 세금을 통해 부를 재분배하고 공공 서비스에 투입하여 사회 전체에 혜택을 주면, 사람들 사이의 신분 격차를 상당 부분 좁힐 수 있다.

p 626.
 문제는 ‘부=행복’이라는 중독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적절한 치료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난 15년 동안 쏟아져 나온 연구를 종합해 보면, 부모의 양육 방식과 아이들의 물질적 성향 사이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애정을 주고 다정하게 대하고 아이에게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고 적당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자기 표현 욕구를 들어주면, 아이는 사람과의 관계를 신뢰하고 자신 있게 자아의식을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이를 가까이서 돌보는 사람이 냉담하고 애정 표현에 일관성이 없고 엄격하기만 하고 반응을 잘 안 보이고 걱정만 하면, 아이는 강하고 독립적인 정체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신감과 안정적인 정서적 애착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 이런 아이들은 예외 없이 인정을 어기 위한 대안으로 물질적 성공, 명성,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무차별적인 광고와 마케팅 전략은 더 많은 부와 소유, 신분과 사회적 지위로 그들이 추구하는 애정과 온기와 인정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꼬드기면서 아이들의 정서적 불안을 역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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