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좋아하는 것/# 책

-. 불안/ 알랭드 보통/ 정영목 옮김/ 이레

불안/ 알랭드 보통/ 정영목 옮김/ 이레

 


원인

1. 사랑결핍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p 16.
 누가 우리한테 사랑을 보여주면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존재에 주목하고, 약점이 있어도 관대하게 받아주고,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우리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고, 요구가 있으면 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가져주면 우리는 번창한다. 낭만적인 사랑과 지위와 관련된 사랑은 다를 수도 있따. 후자의 경우 성적인 관련이 없고,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고, 그런 사랑을 해주는 사람에게 보통 다른 동기가 있다. 그러나 지위와 관련된 사랑을 받는 사람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호의적인 눈길을 받으며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p 17.
 낮은 지위가 끼치는 영향은 물질적인 맥락에서만 볼 수 없다. 적어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 신체적으로 그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낮은 지위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들을 낳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일차적이다. 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 않으면 불평 없이 견딜 수 있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이다. 그들은 사회 극빈층이 겪는 것 보다 훨씬 더 심한 궁핍을 기꺼이 견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텨낸다.
 마찬가지로 높은 지위가 주는 유익은 물질적 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돈만큼이나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존경을 추구한다.

p 18.
 애덤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이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씸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 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략)"

<사랑의 중요성>
p 20.
 윌리엄 제임스가 [심리학의 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에서 밀려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를 당하는 것 - 이런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 보다 더 잔인한 벌은 생각해낼 수 없을 것이다. 방 안에 들어가도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해도 대꾸도 안 하고, 무슨 짓을 해도 신경도 쓰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죽은 사람 취급을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대하듯 한다면, 오래지 않아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p 21.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이런 식으로 남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시를 당하든 주목을 받든, 칭찬을 받든 조롱을 당하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엉터리로 우리를 칭찬하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여, 다른 사람이 우리가 못났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으, 중요한 인물이라는 증거도 댈 수 있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증거도 댈 수 있다.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 버린다.

 

 


2. 속물근성
p 27.
 어떤 친구나 연인은 우리가 파산을 하거나 수모를 당해도 우리를 모른 체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가끔은 그 말을 믿어 볼 수도 있겠지),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속물들의 매우 조건적인 관심이다.

p 29.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속물의 존경 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p 35.
 이 문제를 이해하려다 보면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은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모든 학대 행위에 적용되는 패턴이지만, 속물도 속물을 낳는다. 나이든 세대는 낮은 계급에 속하는 것이 곧 재앙이라는 자신의 고정 관념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준다. 자신의 후손이 낮은 지위(자신의 낮은 지위와 남들의 낮은 지위)가 무가치한 존재로 연결되지는 않고, 또 높은 지위가 곧 훌륭한 존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내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감정적 토대를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p 36.
 그러나 우리 자신이 속물적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기도 힘들다. 이 병은 애초에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도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두드러지는 집단의 속물근성은 모든 사람을 사회적 야심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 양 쫓아다니게 된다.
 그런 행동은 두려움에서, 존엄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경멸하기보다는 슬퍼하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3. 물질적 진보
<평등, 기대, 선망>
p 58.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p 80.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롸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원시의 야만인보다 더 심한 궁핍을 느낄 수도 있다. 

4. 능력주의
p 92.
 다듬지 않은 사회적 항거의 외침이었던 루소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보이는 발판 위에 올려놓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 내에는 본래부터 착취의 역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 내에는 본래부터 착취의 역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고용주는 노동자의 생산물을 팔아 얻는 돈보다 싼 값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며, 그 차액을 “이윤”으로 자기 호주머니에 챙기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언론에서는 이런 이윤을 고용주의 “모험”과 “경영”에 대한 보답이라고 찬양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말이 도둑질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조건]은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이유에 관하여 마르크스와 똑같은 관점을 보여준다. 부자들이 부유한 것은 똑똑하거나 적극적이거나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교활하고 비열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게으르거나 술에 절어 살거나 우둔해서가 아니라, 눈을 뜨지 못한 채 주인에게 학대당하기 때문이다.

p 96.
 1015년경 엔셤의 수도원장 앨프릭은 동트기 전에 일어나 땅을 갈고 수확물을 거두어들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창조한다고 강조했다. 이 일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위계에서는 그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그들을 존중해야 했다. 이렇게 보통 일꾼들을 칭송한 사람은 이 수도원장만이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정통적인 경제학 이론들은 일하는 계급들이 사회의 부를 창조한다고 이야기해왔다. 부자들은 사치와 방탕으로 자원을 낭비할 뿐이었다.
 누가 국부를 창조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별다른 공격을 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나 1723년 봄, 런던의 의사 버나드 맨드빌은 운문으로 쓴 소책자 [벌의우화]를 발표했고, 이것이 부자와 빈자를 바라보는 방법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맨드빌은 수백 년 동안 전해오던 경제적 사고와는 반대로 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은 부자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이 지출을 하기 때문에 그들 밑의 모든 사람이 고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부자들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부자가 없다면 빈자는 곧 무덤에 드러눕게 될 터였다. 맨드빌은 부자가 빈자보다 훌륭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자가 허영심 많고, 잔인하고, 변덕스럽다고 조롱하면서 쾌재를 부르는 느낌마저 준다. 그들의 욕망은 한계를 모르며, 그들은 칭찬을 얻고 싶어 하지만 행복이 물질적 획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큰 부를 추구하여 그것을 얻는 일은 열심히 해도 별 보람이 없는 노동자들의 일보다 사회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때는 그들의 영혼을 볼 것이 아니라(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은 흔히 그렇게 하지만),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아야 한다. 이런 새로운 기준으로 판단할 때 돈을 모으고(상업, 산업, 농업에서) 그 많은 부분을 소비하는(터무니없는 사치품에 쓴다거나, 불필요한 창고나 시골의 대저택을 짓는 데 쓴다거나)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 

p 100.
 아담 스미스. “그들은(부자) 이기심과 탐욕을 타고났지만, 그들은 오직 자신의 편리만 추구하지만, 그들이 고용하는 사람들의 노동으로부터 그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의 만족뿐이지만, 결국 부자들은 모든 개선의 산물을 빈자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마치 땅을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생활필수품을 고르게 분배하면, 그 결과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고 종의 증식 수단을 제공한다."

-> 내 생각이지만 노동자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것을 착취한다는 시각을 바꾼 아담스미스의 말. 부자부터 생각한다는 것인데… 미국의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모자를 벗듯.. 부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주더라도..

 p 111.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부가 혈연과 연줄을 따라 세대에서 세대로 내려가던 때에는 돈이 부자 부모에게 태어났다는 것 외에 어떠한 미덕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능과 능력만을 기초로 위엄 있고 보수 많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부가 품성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 112.
 능력주의 사회의 이상 덕분에 다수가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수백 년 동안 부동의 계급 제도 내에 억눌려 있던 재능있고 똑똑한 개인들이 이제 전체적으로 평평해진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재능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출신, 성별, 인종, 연령은 개인의 발전에 서 넘을 수 없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보상의 분배에 마침내 정의의  요소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하게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시대를 맞아 정의는 부만이 아니라 빈곤의 분배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낮은 지위는 이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p 119.
 마이클 영은 [능력조의의 등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을 안다. (중략) 만일 되풀이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면 허세를 부릴 수가 없다. (중략) 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5. 불확실성
<불확실한 요인들>
p 127.
 1907년 미국에서는 [3에이커와 자유]라는 책이 독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저자인 볼턴 홀은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만 하는 상황의 어색함을 이야기한 뒤, 독자에게 사무실이나 공장을 떠나 미국 중부에서 농지 3에이커를 적당한 가격에 사라고 권했다. 이 정도 면적이면 금세 4인 가족이 먹고살 만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소박하지만 편안한 집을 유지할 수 있으니, 아첨과 협상으로 동료나 상사와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따는 이야기였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p 129.
 피고용자가 되는 고통에는 고용 기간의 불확실성만 아니라 수많은 작업 관행과 역학에서 오는 모욕감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업체가 피라미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피고용자로 이루어진 넓은 밑변은 관리자들로 이루어진 좁은 꼭짓점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보상을 받고 누가 뒤처지느냐 하는 문제는 작업장을 억합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요인이 되며, 이런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불안이 자라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성취를 객관적으로 평하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승진이나 그 반대로 가는 길은 일의 결과와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조직의 피라미드를 성공적으로 기어올라가는 등반가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문명화된 삶에서는 지침을 얻기 힘든 여러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들이다.

p 136.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의 유대, 우정, 성적인 매력 때문에 가끔 물질적 동기가 부차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모한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해법
1.철학
<철학과 약점의 극복>
p 157.
 이성의 규칙에 따르면 주어진 결론은 타당성 있는 최초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거쳐 도출되었을 경우에만, 오직 그런 경우에만 참으로 간주된다. 철학자들은 수학이 훌륭한 사고의 모범이라고 생각하여 윤리적인 생활에서도 수학의 객관적 확실성에 준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이성 덕분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공동체로부터 불공정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면 공동체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망상에 사로잡혀 2 더하기 2는 5라고 주장하는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한들 흔들릴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p 158.
 로마 제국이라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던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면,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철학자 황제는 그런 주장으로 명예에 기초하여 사람을 편가하던 당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금, 상아, 작은 꽃 한송이는 어떤가?" 마르쿠스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p 159.
 마찬가지로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따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며 성공을 거둔 불면증 환자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해왔듯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런 점과 관련하여 다른 감정들의 쓸모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태가 되거나 어떤 것을 소유하면 불행해질 수도 있따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상태나 소유를 선망할 수 있다. 또 우리의 진정한 요구와 관련이 없는 야망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우리 감정은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를 건강과 미덕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이렇게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적 이상

 


<지적인 염세주의>
p 163.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이 점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이렇게 여론에 결함이 이는 것은 공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해버리기 때문이다.

p 164.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염세적 태도의 출발점이며, 철학사에서는 이런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예를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p 166.
 정말로 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우리의 자존심을 카드놀이 하는 집단에게 내맡기는 것이 분별력 있는 일일까?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존중한다 해도 그 존중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일까? 쇼펜하우어는 이런식으로 묻는다. "만일 청중이 한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p 168.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보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우리는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가치를 느껴야 하는데, 사실 이때 느끼는 만족감이 근거가 더 탄탄하다.

2. 예술
<예술과 속물근성>
p 181.
 토머스 버트람 경은 속물근성 때문에 자녀 교육을 망치며, 딸들은 돈 때문에 결혼을 했다가 감정적인 대가를 치르며, 부인은 심장이 돌처럼 굳는다.[맨스파크 필드/ 제인 오스틴]

p 187.
 사마드는 자신의 존엄을 찾는 꿈, 자신의 지위의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결과에서 벗어나는 꿈을 꾼다. 그는 자기 내부의 풍요로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p 189.
 나는 웨이터, 이혼녀, 간통자, 도둑, 교육받지 못한 사람, 이상한 아이, 살이범, 죄수, 낙제생,스스로 아무 말도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그런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비극>
p 204.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 않는다는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희극>
p 223.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 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권력 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권위에 대한 불만 토로가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농담은 겉으로는 해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직접 말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p 224.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 희극적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중요한 외과 수술을 하는 의사를 조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술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서 거만하게 의학적 은어로 부인과 딸들을 으르는 의사는 조롱할 수 있다.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조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은 조롱한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은 조롱한다. 우리는 조롱을 하고, 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이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3. 정치
p 249.
 베블런의 이야기에 따르면, 상업 사회에서는 덕은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릴 것이다.

4. 기독교
<죽음>
p 297.
 지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다른 데로 방향을 트는 데 죽을병이 어떻게 도움을 줄까?
 무엇보다도 사회가 우리를 존중하던 여러 가지 이유를 빼앗아간다. 예를 들어 저녁 파티를 열고, 능률적으로 일을 하고, 후원을 할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진다. 이런 과정에서 죽음은 지위를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던 관심의 덧없음, 나아가 무가치함을 드러낸다. 우리의 건강이 좋고 권력도 막강할 때는 우리를 칭찬하는 사람이 진짜 애정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어떤 이익을 노리고 그러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나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사회적 지위 때문인가?"하고 물어볼 용기 또는 냉소적 태도는 보여주기 힘들다. 그러나 병은 세속적 사랑의 조건을 제거하여 그런 구별이 잔일할 정도로 분명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그들이 냉혹하게 유혹의 책략을 썼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 만큼 허영심이 컸다는 사실에도 화가 난다. 죽음을 생각하면 사교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붕,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p 299.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대신 죽어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p 300.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악용을 할 수도 있지만(사람을 공황에 빠뜨려 억지로 어떤 일을 하게 한다든가), 잘 이용하면 성공을 위해 근복적인 일을 계속 미루며 살아가는 태도를 고치는 데 도움을 줄 수 도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사회의 기대 가운데 정당성이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p 307.
 우리는 모두가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물질, 즉 먼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p 316.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진다.

<공동체>
p 330.
 그러나 기독교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사람이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요구와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낯설다는 인상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이니 깨달음이다.

p 333.
 도시의 공적인 공간이나 시설이 그 자체로 훌륭할 때에도 개인적 영광에 대한 야심은 어느 정도 줄어든다. 그냥 평범한 시민이 되는 것이 괜찮은 운명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는 가장 큰 도시에 가도 낯선 사람들과 함ㄲ 버스나 열차를 타는 일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로스앤젤레스나 런던만큼 강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취리히의 최고 수준의 전차네트워크 덕분이다. 취리히의 전차는 청결하고, 안전하고, 따뜻하며, 그 정확성과 기술적 솜씨라는 면에서 교훈적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5. 보헤미아
p 363.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을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p 372.
 무시 자체가 무시당하는 자의 우월성의 증거가 된다.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는 <에르나니>의 서문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진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에세이 <자립>에서도 비슷한 외침이 울려 퍼진다.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 에머슨의 말에 따르면, 어떻게 살고, 옷을 입고,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고귀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금언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에머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p 375.
 다다의 창립자 트리스탄 차라는 1915년에 취리히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똑똑한 사람은 표준적 유형이 되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백치다. 다다는 모든 곳에서 백치적인 것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p 384.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p 385.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사업자 정보 표시
제이 퍼니쳐 | 지석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대로 97, 29동 315호 | 사업자 등록번호 : 455-07-00311 | TEL : 010-4237-7769 | Mail : jidaegi@gmail.com | 통신판매신고번호 : 제2016-서울금천-1097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