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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인플루엔셜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인플루엔셜

 

 


 

과정을 무시하는 결과와 목적론.
거부감이 들었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러의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아들러의 말대로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려면
우리는 많은 많은 수행과 경험으로 마음을 단련한다면,

진정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1. 첫 번째 밤 -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p 9.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있다.

p 12.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p 33.
 그래서 아들로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본다네.

p 35.
 혼동하지 말게. '원인론'과 '목적론'은 다르네. 자네는 모든 것을 원인론에 근거해서 말하고 있어. 원인론을 맹신하면서 사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네.

p 37.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어떤 재난이나 사고를 통한 충격적인 경험, 트라우마)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p 45.
 가령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이혼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는 사계절 내내 18도를 유지하는 우물물과 같이 객관적인 사실이지? 하지만 그것을 차갑게 느끼느냐 뜨겁게 느끼느냐는 '지금'의, 그리고 주관적인 사실이라네.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상태가 정해지는 거지.

→지금의 주관적인 사실이란 표현은 맞다. 과거에 어떤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상태가 정해진다.? 생각해보자. 만약 이런 가설이 맞다면, 어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도 그것은 아무일도 아니었어 라고 생각하며 다음 날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에 대해. 그래서 이것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필요하지만, 절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를 감정적인 선을 배제한 후,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면 결국은 신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다니 말이야.

p 48.
 답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네.

p 55.
 분명히 행위로서의 악은 숱하게 존재하네. 하지만 어떤 범죄자든지 순수하게 나쁜 짓을 하려는 의도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않네. 모든 범죄자에게는 범행을 저지를 만한 내적인 '마땅한 이유'가 있지. 가령 금전에 얽힌 원한 문제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세. 이것도 당사자에게는 '마땅한 이유'이자 '선'의 수행이라네. 물론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의미에서 선이지만.

 자신에게 득이 된다고요?

 그리스어로 선을 뜻하는 '아가톤'이란 단어에는 도덕적 의미 외에도 '득이 된다'라는 의미도 있네. 반면 '악'을 뜻하는 '카콘'이란 단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고. 이 세계에는 부정이나 범죄 등 각종 악행이 만연해 있지.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악', 즉 '득이 되자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여기서 선이란 도덕적인 선을 제자가 이야기했는데 그리스말로서 선의 의미를 흐리고 있다. 선은 절대적 착함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은 이기심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신에게 착한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절대적 자아는 신밖에 없다. 자아라는 것은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어떻게 나 스스로 착해져서 그것을 선이라는 말로 넣을 수 있는가? 아가톤이란 단어의 어원을 조금 더 알아야할 필요는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말을 이기심과 착각한 듯 하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금전에 얽힌 원한 문제로 살인을 한다는 것이 결코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서 살인을
했을까? 이득보다는 감정조절의 실패가 아닐까? 

p 63.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p 65.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할 용기가 부족하다, 즉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말한 것 중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습니까?

 없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생활양식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구체적인 방안이 되겠군요. 이 부분은 아직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맞아 그랬지. 자네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뭘까? 바로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걸세. 이를테면 방금 전에 자네는 "만약 Y처럼 될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말했네. 그런 식으로 "만약 ~였더라면"이라고 하는 가능성 속에서 사는 동안에는 절대 변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자네는 변하지 않을 핑계로 "만약 Y처럼 될 수 있다면"이라고 말한 거니까.

p 66.
 뭐 어떤가. 단순한 과제―해야 할 일―를 앞두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이리저리 찾는 게 더 고달픈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소설가를 꿈꾸는 내 친구의 경우는 '본인 스스로'가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일세.

2. 두 번째 밤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p 78.
 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일단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라네. 이러한 접근 방식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부여’라고 하지.

p 80.
 하지만 잊지 말게.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p 89.
 그럼 열등감을 가리키는 독일어 '민더베르티히카이트게퓔(Minderwertigkeitsgefühl)'을 떠올려보게. 방금 전에 나는 그 단어가 가치판단과 관계있다고 말했네. 그렇다면 대체 가치란 무엇일까?

p 90.
 요컨대 가치란 사회적인 맥락에서 성립하는 거라네. 1달러짜리 지폐에 주어진 가치는 상식(공통감각)의 하나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가치과 없지. 인쇄물로서 원가를 고려해도 1달러어치의 가치도 없다네. 만약 이 세계에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1달러짜리 지폐를 난로에 던져 넣고 불을 지필 걸세. 코를 풀지도 몰라. 그와 같은 논리로 내 키에 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p 101.
 그렇지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아.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걸세.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고 하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거든.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네.

p 103.
 물론 상처를 입은 사람이 "너는 내 마음을 이해못해"라고 하는 말해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겠지. 당사자의 기분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자신의 불행을 '특별'하기 위한 무기로 휘두르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네.

p 105.
 '우월성 추구'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의지를 말하는 거지, 남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경쟁하려는 의사가 아닐세.

 인생이 경쟁이 아니란 건가요?

 그렇네.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그저 앞을 보고 걸으면 되는 거지. 물론 다른 사람과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p 111.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p 113.
 자네가 전에 말했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가 없다"라고 말이야. 그것은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하지만 일단 경쟁의 도식에서 해방되면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가 없네. '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도 해방되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되네.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어줄, 믿을 수 있는 타인. 그것이 친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p 114.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세계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질 걸세. 더는 세계를 위험한 장소로 보지도 않고, 불필요한 시기심이나 의심에 눈이 멀지도 않을 걸세. 대신에 세계가 안전하고 쾌적한 장소로 보이게 되겠지.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도 눈에 띄게 줄어들 걸세.

p 122.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걸세. 
 우리에게는 말이 있지 않나.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 논리적인 말을 믿는 걸세.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p 126.

인생의 과제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p 133.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3. 세 번 째 밤 -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p 156.
 인정받지 못하면 괴롭다, 타인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감을 잃는다. 그러한 삶이 과연 건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신이 보고 있으므로 선행을 쌓는다"라는 생각. 그러나 그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악행이 허용된다"라는 허무주의와 등을 맞대고 있는 사상이라네. 우리는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신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네. 오히려 신이 없는 허무주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지.

p 157.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을 수단으로 삼네.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받는다는 상벌교육의 흐름에 따라서 말이지.

p 163.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p 168.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p 175.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목표가 아니야. 오히려 입구라고 할 수 있지.

p 176.
 아이가 신발 끈을 잘 묶지 못하면 바쁜 엄마가 보기에는 아이가 묶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자신이 묶어주는 편이 훨씬 빨라. 하지만 그건 아이의 과제를 빼앗는거야. 완전한 개입이지. 그리고 그러한 개입이 되풀이 되면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인생의 과제를 직시할 용기를 잃게 돼. 

p 183.
 부자유스러운 삶을 택한 어른은, 지금 이 순간을 자유롭게 사는 젊은이를 보고 향락적이라고 비판하지. 물론 이는 자신의 부자유스러운 삶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인생의 거짓말일세.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택한 어른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거야. 오히려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응원하겠지.

p 184.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충동일세.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트는 그러한 욕망을 가리켜 ‘경향성’이라고 했지.
경향성 - 습관적인 감성적 욕망을 이르는 말이다. 이성적인 사고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성향을 뜻한다.

p 186.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있다는 증표일세. 

p 187.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일세.

p 193.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다가서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조금도 관계가 없었네. 상대방이 나와 관계를 회복할 의사가 없어도 상관없었지. 문제는 내가 결심하느냐 마느냐 하는거지.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가 ‘내’가 쥐고 있다는 말일세.
 사람들은 대개 인간관계의 카드는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신경을 스고, 타인이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는 삶을 산다네. 하지마나 과제의 분리를 배우고 나면 모든 카드를 내가 쥐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거야.

p 194.
 그것은 타인을 조종하려는 잘못된 생각이야. 내가 변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어. 그 결과, 상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이것도 과제의 분리라네. 물론 내가 변화하면서 -나의 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상대가 변하기도 하네. 대개는 변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그것이 목적은 아니라네.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어쨌든 타인을 조종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어컨대 잘못된 발상일세.

4. 네 번 째 밤 -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p 215.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걸세. 즉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만약 자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걸세. 모든 타인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니 굳이 내가 나서서 행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얒.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하는 길일세.
무언가를 주어야 내가 있을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

p 226.
 칭찬한다는 행위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라는 측면이 포함되어있지.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라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일체 없지.

p 227.
 우리가 남을 칭찬하거나 야단치는 것은 ‘당근을 쓰느냐, 채찍을 쓰느냐’ 하는 차이에 불과해. 배후에 자리한 목적은 조종에 있지.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아니면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일세. 자네가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은 수직관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세.

p 230.
 아픈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럴 때에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네.

p 232.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그러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는 것이겠지.

p 235.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감사의 인사라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p 236.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5. 다 섯 번 째 밤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p 260.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걸세.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짗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지. 한편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지. 더 쉽게 설명하자면, 60점짜리 자신에게 "이번에는 운이 나빴던 것뿐이야. 진정한 나는 100점짜리야"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긍정이라네. 반명에 60점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 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일세.

p 261.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p 264.
 다른 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걸세. 비록 신용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 근거가 없더라도 믿는다, 담보가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무조건 믿는다. 그것이 신뢰라네.

p 265.
 신뢰의 반대가 뭔가? 회의라네. 반대로 자네가 인간관계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하지. 남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고, 가족과 연인을 의심하며 살고 있다고 말이야. 거기에서 어떤 관계가 싹틀 수 있을까? 자네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상대방은 바로 알아채지. "이 사람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거기에서 어떤 발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겠나? 우리는 조건 없는 신뢰를 가져야 하네.

p 267.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아닐세. 조건 없는 신뢰란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한, 수평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만약 자네가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면 단칼에 끊어버려도 상관없네. 끊느냐 마느냐는 자네의 과제니까.

p 269.
 배신을 할지 말지는 타인의 과제니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건가요? 긍정적으로 포기하라? 선생님의 주장은 늘 감정을 배제하고 있어요! 배신으로부터 비롯되는 분노와 슬픔은 어쩌라는 겁니까?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게. 고통이나 슬픔을 피하려고 하니까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걸세. 이렇게 생각해보게. 우리는 남을 신뢰할 수 있네. 의심할 수도 있지. 또한 우리는 타인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네.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선택은 명백하지 않은가.

p 271.
 물론 공동체 감각이란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세번 째 키워드, '타자공헌'필요 하다네.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공헌'일세.
 타자공헌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들러는 타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며 경종을 울리기도 했지.

p 272.
 즉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p 273.
 가장 알기 쉬운 타자공헌은 '일'이라네.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 또는 집안일을 하는 것. 노동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야.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받아들이게 되지.

p 276.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수용'을 한다 → 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 →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 →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p 277.
 '자립할 것'과 '내게 능력이 있다는 의식'은 자기수용에 관한 얘기네.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과 '사람들은 내친구라는 의식'은 타자신뢰와 타자공헌으로 연결되지.

p 285.
 나를 '행위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행복해질 용기'와 관련된 문제일세.

p 291.
 인간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단 그때ㅑ의 공헌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즉 '공헌감'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철학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즉 행복이란 '공헌감'이라고.

p 307.
 자네가 극장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그때 극장 전체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객석 구석구석까지 잘 보일거야. 하지만 자네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바로 앞줄조차 보이지 않게 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p 312.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

p 313.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p 318.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지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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