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문/ 안도현/ 이야기가있는집
서점에 들렸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시인은 숨소리 하나의 의미에도 대단한 관찰력을 보이며, 글로 멋진 조각을 한다. 사랑과 미움,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라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도현 시인의 잡문이다.
p 4.
바람이 차요. 잘 자요.
p 7.
뼛속 깊이 쉬는 하루였으면
p 31.
꽃이 입이 없어서 말 못하는 줄 아나? 꽃은 향기로 말하지.
p 36.
벚나무 잎사귀들이 제일 먼저 물들어 땅에 내려앉는다. 제일먼저 철든 것인가. 제일 철없는 것인가.
p 64.
낡아가는 것들이 아름다운건 시간 때문이다.
p 65.
나는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햇빛이 미끄러져 내리는 나뭇잎의 앞면보다는 뒷면의 흐릿한 그늘을 좋아하고 남들이 우러러보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나 혼자 가만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더 사랑한다.
p 71.
장난삼아 어머니를 업어보고
너무나 가벼워 목이메어
세 세걸음을 못 옮겼네.
이시키와 다쿠보쿠의 단가
p 101.
마당에 나가 눈을 쓸었다. 아침 일찍 빗자루를 들었을 때 사람은 조금 착해진다.
p 111.
눈이 하도나 예쁘게 예쁘게 내려오시어 학생들이 나는 바라보지 않고 창밖만 내다본다. 그냥 놔두기로 한다. 책 붙잡고 있는 내가 잘못이지 젊은 것들 마음이야 오죽하려고.
p 112.
많이 춥니? 좋은 일이구나. 감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야. 살아있을 때 고마워해야해.
p 121.
오래된 간판이 걸려 있을 것, 공간이 넓지 않을 것, 메뉴가 단출할 것, 처음 가는 음식점을 선택할 때 내가 꼭 고려하는 것들이다.
p 133.
김성호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분이다 그이의 책<나의 생명수업>에 나오는 이런 문장은 얼마나 멋진가.
" 버섯의 벗이 되려면 버섯보다 많이 큰 내가 먼저 버섯의 높이로 땅에 엎드리면 된다는 것."
p 137.
마당의 잔디 깎다가 방아깨비 두어마리 허리도 잘랐다. 그러거도 나 저녁밥 잘먹었다.
p 200.
나를 낮추어 상대방을 높이는 걸 겸양이라 한다. 그런데 자신을 상대보다 무조건 낮추는 걸 미덕이라 생각하고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려한다면 그건 아첨이나 비굴이다. 그런 자가 있다. 그런 자를 가리켜 허우대는 멀쩡한데 똥파리보다 못한 놈이라 한다.
p 220.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
p 223.
우표를 듬뿍 붙인 우편물은 왠지 덤을 더 받은 것 같아 고맙다. 한 번 더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p 227.
어제 과음한 덕분에 하루 종일 폐인처럼 지낸다. 책 한줄 안읽고, 씻지도 않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창밖 힐끔거린다. 이것도 참 좋다.
p 235.
술을 마시고 나왔다. 머리에 비를 맞았다. 이유없이 좋았다.
p 마지막 표지.
멀고 그리운 것들은 다들 가까이 있었구나. <소설가,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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